역사를 왜곡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침식해가고 있었으며 우리역사를 부정하고 비하함으로써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주의역사가들은 식민사학의 논리를 깨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역사학은 조국이 식민지라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
발표
<독립신문>사장으로 취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 대통령대리를 겸직.
임정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
1925년 11월 1일 , 향년 67세로 서거
의의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서술
민족주의 사관이 깊이 반영된 역사책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적 가치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나갔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성장한 19세기의 조선은 세도정치와 민생의 피폐로 인한 전국적인 민란, 동학의 창시와 교주 최제우의 처형 및 동학농민운동, 천주교세의 확대와 박해, 이양선 출몰과 병인·신미양요 등등 국내외적으로 전통사회에 대하여 큰 충격이 가해진 시기였다.
역사관을 극복하여야 하는 동시에 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켜야 한다. 여러가지 혼돈 속에서 해방 후 민족분단으로 남한은 실증사학이 민족주의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게 되었고, 북한은 사회경제학이 주도함으로써 지역적으로 분리된 채 정리되었다. 그래서 한국역사학의 발전과저을 살
민족주의와 실증주의 중 어떠한 관점에서 역사교육을 할 것인가를 논의함에 있어, 먼저 역사와 역사교육의 개념과 전통,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사학과 한국역사학의 흐름을 정리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실증주의를 포함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계몽사상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고 있던 사실도 유의할 일이다. 후일 그가 한편으로 강렬한 민족주의 사론을 쓰고 한편으로 문화사적 사풍으로써 국사의 대중화에 힘쓴 데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광문회 회원이었던 박은식도 한국통사를 지어 민족주의 사학에 한 기원을 지웠다.
한국사학으로서의 역할
④독립운동사적 현대사인식의 확신
(2)분류사 단행본의 양산
-해방 후의 저술목록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될 문제 (<경제사 분야>: 13권, <사회사 분야>: 9권, <문화사 분야>: 37권이 발행됨)
①분류사 연구에 대한 오늘날의 계속성 문제
②정치사 연구가 부진: 전통시대의
민족주의사학자들의 관념성과 추상성을 비판하면서 대두된 것인데, 마르크스의 발전이론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비록 마르크스적 경제사관에 입각한 연구방법론에 문제가 적지 않고 학문적 체계가 잘 정돈되지 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일제강점 하에서 한국의 원시 · 고대 · 중세
박은식 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다시금 부활시켜 주었던 이러한 사상은 식민주의 사관을 해소시키는 데 가장 특효한 약이 될 수도 있는 반면 그의 역기능 또한 엄존한다. 바로 민족의식에 지나치게 경도된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민족지상주의적 위험이 크기 때문에 이쪽으로